✍️아픈 몸과 사는 이소의 일상
1.
“아 망했어”
빈 노트북 화면을 봅니다. 번번이 머릿속이 텅 비지만 마감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다시 떠올려봐요. 분명 급한 상황인데 타이핑해야 할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번번이 왜 이럴까요. 제때에 뭔가를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두려움이 커지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은 움직임을 멈췄는데 머릿속은 번잡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안 줄거야."
"의뢰인에게 버려질 때는 버려지더라도 지금은 어떻게든 이 일을 해야 해."
마음속에서 자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가라앉고, 조금 마음이 비워진 다음에야 손이 움직입니다. 곧바로 글쓰기 마감을 해낸다는 건 아니에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발모벽 습관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요. 노트북 키보드는 잠시 잠잠해지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죠. 사회인으로 잘 기능하지 않는데 어째선지 아직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직 밖에서의 일들로, 저의 느린 속도로요.
ADHD.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저는 주의력결핍 우세형이고 눈뜨자 마자 일상을 감각하는 제 상태는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2.
누군가는 ADHD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어요.
“ADHD는 기본적으로 각성 상태가 낮고 집중의 유지가 어려운 게 문제입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몸을 부산하게 움직이면 뇌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므로 각성을 올릴 수 있는데, 조용히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뇌로 들어오는 외부 자극이 적어지면서 각성이 확 떨어지므로 마치 퓨즈가 끊기듯 언제인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들어 버리게 됩니다.”
만약 만화 <포켓몬스터> 속 포켓몬들이 진짜 동물이라면 저는 겉모습만 사람인 잠만보인 게 틀림없어요. 틈만 나면 잠이 오거든요. 사실 어제에도 이 글을 써야 하는데 초저녁에도 방에 들어가니 잠이 왔어요. 일찍 자도 졸리고 늦게 자도 졸려요. 중고등학생일 때는 꽤 많은 잠을 잤던 게 떠올라요.
물론 일을 해야 하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비교적 깨어있음에 대한 의지가 부려지긴 하지만요. 혼자 있어서 주변이 조용할 때는 보통 잠이 와요. 일찍 자도 늦게 자도 머리만 기댈 수 있으면 몽롱해지죠. 잠을 자면 꿈속 세계는 또 어찌나 다채로운지. 자주 가는 나라도, 장소도, 종종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에 깔린 졸음 탓인지 움직임이 느려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을 할 때 마감시간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30대 초중반까지는 마감일 다음 아침까지 어떻게든 글을 보냈는데, 요즘은 심하면 5일 정도를 넘기게 되더라고요. ‘엄수할 시간이 있다.’ 스스로에게 강조시킵니다만. 제때에 책상 위에 앉으면 불안이, 불안이 없으면 제때에 책상에 앉는 게 잘 되지 않아요.
3.
“그렇게 자꾸 잊어버리면 말해주기 싫어져.”
제 어떤 부분을 보고 조언을 해주던 친구가 있어요. 저를 아껴주는 친구지만 그의 말을 기억하려면 제대로 듣는 것부터 해야 하거든요. 5분에서 10분 정도만 지나면 눈앞이 흐릿해지는 제 입장에서는 눈앞의 상대 말도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목소리마냥 희미해집니다.
내 눈앞의 친구는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겠죠? 저는 번번이 기억을 못 해요. 어딘가에 적어두면 그 적어둔 사실도 잊어요. 저같은 뇌를 갖는 건 다른 사람에게 번번이 미안해지는 일입니다. 친구는 제가 잘 까먹는 뇌를 가진 걸 알면서도 못내 서운해하고, 때로는 기억 못 하는 상황을 노력 부족이나 인성의 문제로 말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저는 혼자 속상해 속쓰림이나 어지러움, 더 심할 때는 자꾸 눈이 감기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스트레스가 심해진 채로 길을 걷다가 눈이 자꾸 감기고 다리가 풀리는 통에, 길 가다 마주친 동네친구의 어깨를 잡고 간신히 걸어간 적도 있어요.
스트레스에 왜 이렇게 취약한 걸까요. 어디서 기사를 봤는데 ADHD 증상 중 하나가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거래요. 이유가 뭔지는 의학전문기자들이 어째선지 안 적어뒀더라고요.
4.
“앗, 아침에 머릿속이 텅 비는 게 안 당연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의 할 일이 바로 떠오른다는, 다른 에세이 작가의 말을 듣고 놀랐어요.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거의 매번 머릿속이 하얗거든요. 기억나는 잠깐의 순간 구글 캘린더 한주의 해야 할 일을 적어둬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마감일이 언제인지. 그런 것들을 적어놓고 알람설정을 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알람을 해놓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요. 주의력이 흩어지니 뇌가 전달받는 정보값이 틀릴 때가 있거든요. 다음주 일정인데 이번주로 적어두기도 하고, 시간을 틀리기도 하고. 알람만 믿다가 가끔 일정이 꼬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이 종종 생길 때마다 식은땀이 참 많이 나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긴 하지만요. 과하게 긴장하면 땀이 나는 게 당연한 걸까요. 아니면 제가 유난히 땀을 잘 흘리는 사람인 걸까요.
5.
오늘은 마감시간을 한참 넘긴 외주 글을 간신히 써내고 역시 마감 기한이 지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지지부진하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해내는 스스로가 좀 신기합니다. 언제부턴가 콘서타(ADHD 치료제・중추신경계 각성제)용량을 늘릴 때마다 나타나는 불안 증상이 거의 없어졌어요. 남은 일들을 다시 기억하고, 적어가면서, 오늘 하루를 좀 밀도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가 좀 미워요. 하지만 속도가 안 된다면 방향이라도 제대로 가보려 합니다. 그렇게 애쓰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다시, 다시, 다시"
실수하면 자책의 말 대신 ‘다시'라는 말을 속으로 반복해요. 희미해지는 나를 붙잡는 저만의 주문이에요.
✍️아픈 몸과 사는 이소의 일상
1.
“아 망했어”
빈 노트북 화면을 봅니다. 번번이 머릿속이 텅 비지만 마감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다시 떠올려봐요. 분명 급한 상황인데 타이핑해야 할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번번이 왜 이럴까요. 제때에 뭔가를 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두려움이 커지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은 움직임을 멈췄는데 머릿속은 번잡합니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안 줄거야."
"의뢰인에게 버려질 때는 버려지더라도 지금은 어떻게든 이 일을 해야 해."
마음속에서 자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가라앉고, 조금 마음이 비워진 다음에야 손이 움직입니다. 곧바로 글쓰기 마감을 해낸다는 건 아니에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발모벽 습관이 제멋대로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요. 노트북 키보드는 잠시 잠잠해지며 머리카락을 배배 꼬고 있죠. 사회인으로 잘 기능하지 않는데 어째선지 아직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직 밖에서의 일들로, 저의 느린 속도로요.
ADHD.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저는 주의력결핍 우세형이고 눈뜨자 마자 일상을 감각하는 제 상태는 이런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2.
누군가는 ADHD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어요.
“ADHD는 기본적으로 각성 상태가 낮고 집중의 유지가 어려운 게 문제입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몸을 부산하게 움직이면 뇌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므로 각성을 올릴 수 있는데, 조용히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뇌로 들어오는 외부 자극이 적어지면서 각성이 확 떨어지므로 마치 퓨즈가 끊기듯 언제인지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들어 버리게 됩니다.”
만약 만화 <포켓몬스터> 속 포켓몬들이 진짜 동물이라면 저는 겉모습만 사람인 잠만보인 게 틀림없어요. 틈만 나면 잠이 오거든요. 사실 어제에도 이 글을 써야 하는데 초저녁에도 방에 들어가니 잠이 왔어요. 일찍 자도 졸리고 늦게 자도 졸려요. 중고등학생일 때는 꽤 많은 잠을 잤던 게 떠올라요.
물론 일을 해야 하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비교적 깨어있음에 대한 의지가 부려지긴 하지만요. 혼자 있어서 주변이 조용할 때는 보통 잠이 와요. 일찍 자도 늦게 자도 머리만 기댈 수 있으면 몽롱해지죠. 잠을 자면 꿈속 세계는 또 어찌나 다채로운지. 자주 가는 나라도, 장소도, 종종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에 깔린 졸음 탓인지 움직임이 느려요.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을 할 때 마감시간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30대 초중반까지는 마감일 다음 아침까지 어떻게든 글을 보냈는데, 요즘은 심하면 5일 정도를 넘기게 되더라고요. ‘엄수할 시간이 있다.’ 스스로에게 강조시킵니다만. 제때에 책상 위에 앉으면 불안이, 불안이 없으면 제때에 책상에 앉는 게 잘 되지 않아요.
3.
“그렇게 자꾸 잊어버리면 말해주기 싫어져.”
제 어떤 부분을 보고 조언을 해주던 친구가 있어요. 저를 아껴주는 친구지만 그의 말을 기억하려면 제대로 듣는 것부터 해야 하거든요. 5분에서 10분 정도만 지나면 눈앞이 흐릿해지는 제 입장에서는 눈앞의 상대 말도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목소리마냥 희미해집니다.
내 눈앞의 친구는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겠죠? 저는 번번이 기억을 못 해요. 어딘가에 적어두면 그 적어둔 사실도 잊어요. 저같은 뇌를 갖는 건 다른 사람에게 번번이 미안해지는 일입니다. 친구는 제가 잘 까먹는 뇌를 가진 걸 알면서도 못내 서운해하고, 때로는 기억 못 하는 상황을 노력 부족이나 인성의 문제로 말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저는 혼자 속상해 속쓰림이나 어지러움, 더 심할 때는 자꾸 눈이 감기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스트레스가 심해진 채로 길을 걷다가 눈이 자꾸 감기고 다리가 풀리는 통에, 길 가다 마주친 동네친구의 어깨를 잡고 간신히 걸어간 적도 있어요.
스트레스에 왜 이렇게 취약한 걸까요. 어디서 기사를 봤는데 ADHD 증상 중 하나가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거래요. 이유가 뭔지는 의학전문기자들이 어째선지 안 적어뒀더라고요.
4.
“앗, 아침에 머릿속이 텅 비는 게 안 당연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의 할 일이 바로 떠오른다는, 다른 에세이 작가의 말을 듣고 놀랐어요.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거의 매번 머릿속이 하얗거든요. 기억나는 잠깐의 순간 구글 캘린더 한주의 해야 할 일을 적어둬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마감일이 언제인지. 그런 것들을 적어놓고 알람설정을 하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알람을 해놓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요. 주의력이 흩어지니 뇌가 전달받는 정보값이 틀릴 때가 있거든요. 다음주 일정인데 이번주로 적어두기도 하고, 시간을 틀리기도 하고. 알람만 믿다가 가끔 일정이 꼬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이 종종 생길 때마다 식은땀이 참 많이 나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긴 하지만요. 과하게 긴장하면 땀이 나는 게 당연한 걸까요. 아니면 제가 유난히 땀을 잘 흘리는 사람인 걸까요.
5.
오늘은 마감시간을 한참 넘긴 외주 글을 간신히 써내고 역시 마감 기한이 지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지지부진하지만 어떻게든 뭔가를 해내는 스스로가 좀 신기합니다. 언제부턴가 콘서타(ADHD 치료제・중추신경계 각성제)용량을 늘릴 때마다 나타나는 불안 증상이 거의 없어졌어요. 남은 일들을 다시 기억하고, 적어가면서, 오늘 하루를 좀 밀도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가 좀 미워요. 하지만 속도가 안 된다면 방향이라도 제대로 가보려 합니다. 그렇게 애쓰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다시, 다시, 다시"
실수하면 자책의 말 대신 ‘다시'라는 말을 속으로 반복해요. 희미해지는 나를 붙잡는 저만의 주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