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몸과 사는 유인의 일상

어렸을 때 2년가량 수영을 다녔다. 점점 폐활량이 좋아져 1분 넘게도 숨을 참고 물속에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기를 빼고 나는 자고 있는 순간에도 성실히 숨을 쉬며 쉬지 않고 생을 이어왔다. 그렇게 덩어리째 살았지만 내 인생은 스스로는 토막 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기의 끝에서 다시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올 때 매번 어찌나 어색하던지. 무너질 때마다 진한 징크스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여름에는 불안이 심해지니 약을 증량할 것, 혼자 잠에 들 때는 불을 끌 수 없는 것,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필요시 약을 미리 먹을 것, 약을 먹지 않고는 잠에 들지 못하는 것.. 무너진 일상을 완벽하게 되돌리는 방법은 없었다. 돌아온 내가 달라졌기에 전과 같은 일상을 영위하는 건 불가능했다. 변하기 힘든 게 사람이라던데 불안 앞에 나는 왜 이리 무력한지. 살기 위해 속수무책으로 쪼개졌다. 그 모양은 당연히 맘에 들지 않았다. 각 토막의 끝에서 나는 재수를 하고, 휴학을 하고, 퇴사를 했다. 그래서인지 토막의 시작에서 나는 늘 이번의 끝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토막은 작아졌고 선택지는 줄어갔다. 그럴 때마다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만약으로 시작한 상상 속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그 속에서 한참 꿈을 꾸고 나면 다시 익숙한 불행이 나를 감쌌다. 그러면 더욱 알게 되었다. 토막을 이어주는 다리 따위는 없다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덤을 좋아한다. 귤 다섯 개를 샀는데 바구니에 하나를 더 슥 하고 넣어주는 그 적당한 덤덤함이 좋다. 그래서 애정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담스럽지 않은 덤을 안겨주려 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볕 좋은 날 커피를 선물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맘에 드는 립스틱을 하나 더 사 선물한다. 그들의 행복에 약간을 덤을 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네 번째 토막을 살고 있는 지금에서야 겨우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내게 남겨진 수많은 토막은 모두 덤이라는 것을.
새로운 토막에서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복학을 하고, 재취업을 했다. 여름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조그만 조명을 켜고 자고, 필요시 약 덕에 모임에도 나가고, 약을 먹고 그전보다 질 좋은 잠을 잔다. 그전 토막이 하지 못한 것을 다음 토막은 기어코 해낸다. 만약 토막들에 다리가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리 괴롭지 않았을지도. 바구니에 쌓여가는 불행들을 보며 왜 내 바구니만 이러냐며 슬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바구니는 항상 적당한 채다.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워진다. 나는 이제 덜어진 것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지금은 토막의 끝이 무엇일지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또 덤 같은 다음의 내가 보란 듯이 해낼 테니까.

✍️아픈 몸과 사는 유인의 일상
어렸을 때 2년가량 수영을 다녔다. 점점 폐활량이 좋아져 1분 넘게도 숨을 참고 물속에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기를 빼고 나는 자고 있는 순간에도 성실히 숨을 쉬며 쉬지 않고 생을 이어왔다. 그렇게 덩어리째 살았지만 내 인생은 스스로는 토막 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기의 끝에서 다시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올 때 매번 어찌나 어색하던지. 무너질 때마다 진한 징크스가 하나 둘씩 늘어났다. 여름에는 불안이 심해지니 약을 증량할 것, 혼자 잠에 들 때는 불을 끌 수 없는 것,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필요시 약을 미리 먹을 것, 약을 먹지 않고는 잠에 들지 못하는 것.. 무너진 일상을 완벽하게 되돌리는 방법은 없었다. 돌아온 내가 달라졌기에 전과 같은 일상을 영위하는 건 불가능했다. 변하기 힘든 게 사람이라던데 불안 앞에 나는 왜 이리 무력한지. 살기 위해 속수무책으로 쪼개졌다. 그 모양은 당연히 맘에 들지 않았다. 각 토막의 끝에서 나는 재수를 하고, 휴학을 하고, 퇴사를 했다. 그래서인지 토막의 시작에서 나는 늘 이번의 끝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토막은 작아졌고 선택지는 줄어갔다. 그럴 때마다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만약으로 시작한 상상 속의 나는 너무나 자유로웠다. 그 속에서 한참 꿈을 꾸고 나면 다시 익숙한 불행이 나를 감쌌다. 그러면 더욱 알게 되었다. 토막을 이어주는 다리 따위는 없다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덤을 좋아한다. 귤 다섯 개를 샀는데 바구니에 하나를 더 슥 하고 넣어주는 그 적당한 덤덤함이 좋다. 그래서 애정하는 사람이 생기면 부담스럽지 않은 덤을 안겨주려 한다.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볕 좋은 날 커피를 선물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맘에 드는 립스틱을 하나 더 사 선물한다. 그들의 행복에 약간을 덤을 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네 번째 토막을 살고 있는 지금에서야 겨우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내게 남겨진 수많은 토막은 모두 덤이라는 것을.
새로운 토막에서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복학을 하고, 재취업을 했다. 여름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조그만 조명을 켜고 자고, 필요시 약 덕에 모임에도 나가고, 약을 먹고 그전보다 질 좋은 잠을 잔다. 그전 토막이 하지 못한 것을 다음 토막은 기어코 해낸다. 만약 토막들에 다리가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리 괴롭지 않았을지도. 바구니에 쌓여가는 불행들을 보며 왜 내 바구니만 이러냐며 슬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바구니는 항상 적당한 채다.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면 채워진다. 나는 이제 덜어진 것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지금은 토막의 끝이 무엇일지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또 덤 같은 다음의 내가 보란 듯이 해낼 테니까.